책소개
희곡 <생각>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1914년의 일로, 이 희곡의 원작인 동명의 단편소설이 발표되었던 1902년 이후 12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개인이 느끼는 극도의 고독이다. 다른 인간들과 조화, 세상 만물과 조화 속에서 심적 안정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서적 만족을 찾아야 할 인간들은 산업화되고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너와 나의 하나 됨을 발견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생각 안에 갇혀 버리고 만다. 그리고 유일하게 자신과 함께하는 스스로의 고독을 우주와 내가 하나임을 증명해 줄 유일한 친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갇힌 채 자신의 고독 안에서 쓸쓸하게 자멸해 간다. 주인공인 케르젠체프가 이런 주제를 잘 대변하고 있다. 케르젠체프는 결국 스스로 생각을 조종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한 나약한 인간이 자신의 생각에 조종당하고 있었다는 싸늘한 진실을 대면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랑받지 못했던 한 인간이 끝내 그 방법을 깨우치는 곳이 ‘멀쩡한’ 사람들로 가득 찬 바깥세상이 아니라 ‘미친’ 사람들로 가득 찬 정신병원이라는 신랄한 진실이다.
200자평
생각을 이용하는 위험한 실험을 통하여 인간관계에서의 속된 면을 극복하고 최고의 이성을 얻고자 했던 주인공 케르젠체프의 실패와 좌절을 그린다. 미치광이인 척하여 살인을 저지르면 유형지로 끌려가는 대신 정신병원에 보내질 것이라는 판단 하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미친 척을 했던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로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고 만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책들에 묻혀 살며 ‘생각’만을 유일한 친구로 삼았던 그는 불행히도 그 ‘생각’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지은이
레오니트 니콜라예비치 안드레예프는 1871년 8월 21일, 율리우스력으로는 8월 9일에 러시아 오룔에서 태어났다. 지독히 가난한 유년기를 보낸 안드레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비싼 수업료를 낼 형편이 못 되어 제적당하고 만다. 이후 모스크바국립대학교 법학부로 옮겨 가 공부를 계속했으며, 마침내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그 후 안드레예프는 신문과 잡지 법률 담당 통신원으로 일하게 되었고, 이 시절에 자신의 첫 작품을 발표한다. 누구보다도 먼저 안드레예프의 재능을 알아본 막심 고리키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이로써 안드레예프는 문학 그룹인 지식파(派)에 가입할 수가 있었다. 이후 작품 《침묵》(1901)으로 등단한다. 1901년에 출판된 첫 단편집에 실렸던 단편소설 〈옛날 옛적에〉가 대중의 큰 관심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는데, 1902년에 발표한 〈심연〉, 〈안개 속에서〉와 같은 작품들은 대담한 성(性) 묘사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도 안드레예프는 이후 자신만의 독특하면서도 재능이 넘치는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며 부와 명성을 쌓는다. 정치적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자유로운 문학 활동만을 꿈꾸었던 안드레예프는 볼셰비키가 정권을 차지하자 고국을 등지고 핀란드로 떠난다. 그리고 1919년 9월 12일 핀란드의 한 시골 마을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열정으로 가득 찼던,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리 길지는 않았던 자신의 삶을 타향에서 마감한다.
옮긴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학교 러시아문학부에서 레오니트 안드레예프의 희곡 연구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1년 현재 계명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에서 초빙 전임강사로 재직 중이다. 외국어로서의 러시아어 능력평가시험인 토르플(TORFL: Test of Russian as a Foreign Language)의 최고 단계인 4단계를 통과했으며, 토르플 시험 감독관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증 보유자로 현재 국내 최초의 토르플 시행 기관인 러시아센터에서 토르플 시험 감독관으로도 활동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희곡의 공간>, <한국에서의 러시아어 교육 체계>, <L. 안드레예프 드라마의 예술적 범심론 원칙>, <한국 교육에서 바라본 러시아어의 과거와 현재>, <한국 대학에서의 러시아어 교수법의 특성 고찰> 등이 있다.
차례
나오는 사람들
제1막
제2막
제3막
해설
지은이에 대해
지은이 연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134쪽
케르젠체프: 나의 모든 지력을 다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모르겠소. 내가 미쳤던 건지, 아니면 멀쩡했던 건지 말이오. 그 경계가 사라졌소. 오, 비열한 생각이여, 그 생각은 내가 미쳤다고도, 또 멀쩡했다고도 증명할 수 있다오. 나의 그 생각 외에 도대체 세상에 무엇이 더 있을 수 있겠소?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알 수도 있을 것이오. 하지만 나 자신은 절대로 그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오. 절대로! 내가 누굴 믿을 수 있겠소? 어떤 이들은 내게 거짓을 말하고, 어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또 다른 이들은 나 스스로가 그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소. 누가 내게 말해 줄 수 있단 말이오? 누가 말해 줄 거요?